자매나눔터 성경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고부 - 나오미와 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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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773회 작성일19-11-16 16:54본문
작성자:박준형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오미와 그 자부 룻의 아름다운 고부간의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기대하게 되며 또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소망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삼백년전, 즉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우리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사시대라 하면 이스라엘 민족사에 있어서 매우 암흑한 시대로서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불법이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고 한 말씀이 그 시대의 어둡고 무질서한 상황을 잘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땅에 흉년까지 들었으니 그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그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살았는데 그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 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는 그 두 아들과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여 결혼하였는데 그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또 하나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그들이 거기 거한지 십 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이 다 죽고 나오미는 그 두 자부와 함께 그들의 뒤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 여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쓰라린 아픔을 가슴에 안고, 마치 등불이 꺼진 캄캄하고 텅 빈 집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처량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되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미와 그 자부 룻의 아름다운 고부간의 꽃이 피어나게 되었으니 그 아름다움과 그 향기가 한층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오미에게서 오늘날의 시모님들이 배우고 본받아야 할 교훈과 룻에게서 오늘날의 자부들이 배우고 본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어진 시모 나오미
나오미는 신앙이 매우 독실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얼핏 보면 나오미의 신앙이 독실했다기 보다는 타협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바로 거기에 평범을 넘는 그의 신앙의 독실성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그 남편이 모압 땅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그의 길을 제지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 나선 점이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신앙 감각으로는 그것을 타협으로 볼는지 몰라도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은 그것을 아름다운 "단장"으로, "하나님 앞에 값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벧전 3: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한 이 말씀 속에는 사라의 아브라함에 대한 경외심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라와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은 그것을 여성의 아름다움으로 보아 그렇게 자기들을 단장했던 것입니다. 사라가 그러한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애굽으로 내려가자고 할 때에도 그리고 자기를 누이라고 말하라고 할 때에도 말없이 순복하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사라는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고 남편을 선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벧전 3:6). 나오미도 사라와 같이 그때 자기 남편 앞에서 자기를 그렇게 단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그 두 자부들에게 각기 그들의 친정으로(모압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도 자기을 단장한 거룩한 부녀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얼핏 보면 나오미가 그 자부들에게 참되고 살아계신 여호와를 떠나서 이방신에게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이 보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그들을 강권하고 설득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오미가 자기 자신보다도 그 자부들을 얼마나 더 진실하고 깊게 생각하고 사랑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나오미가 그들에게 "돌아가라"(1:8), "돌아가라"(1:11),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1:12), "그렇지 아니하니라"(1:13), "돌아가라"(1:15)고 한 것은 나오미가 그들을 미워해서 한 말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너무나 진실하게 사랑한 나머지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기 잘못 때문에 그 동안도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그것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가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13)고 한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우리는 시모 나오미가 그 자부 룻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그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를 룻기 2장, 3장과 4장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타협이 아니고 그 시모의 그 자부에 대한 진실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아니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3장 참조).
나오미가 자기 가정에 임한 하나님의 징계를 자기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서도 그 시모의 진실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남편이나 아들들이나 자부들에게 그 탓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1:13),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20),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1:21)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가해자이고 자부들은 그 피해자가 되어 애매히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아팠던 것입니다(1:13). 이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또한 나오미가 자기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 본 위치로 돌아온데서도 그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1:6-19).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나 나오미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오미가 남의 선행에 민감하고 또 그 선행을 갚아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원한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1:8, 2:20).
나오미는 자부애가 뛰어난 어진 시모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고부간의 친밀한 관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 자부들을 부를 때 "내 딸들아", 혹은 "내 딸아"하고 부르는데서 그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자부들을 자기 친딸들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저 "딸아"한 것이 아니고 "내 딸아"하고 부르므로 그 시모의 그 자부들에 대한 정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 짤막한 대화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그 자부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1:11-13, 2:2, 2:22, 3:1, 3:16, 3:18). 나오미는 윗사람답게 늘 그 자부들의 장래, 즉 그들의 재혼을 통한 행복과 안정을 구하는데서도 그의 깊은 자부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여호와께서 너희를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9)고 한데서,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2:22)고 하여 룻으로 하여금 계속 보아스의 곁에 있도록 권고한데서도 그 자부애의 적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3:1)고 하며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을 자상하게 지시한데서도 그 시모의 자부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룻이 보아스를 만나보고 온 다음에 나오미가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3:16)고 묻는 그 시모의 안타까운 물음에서도, 그리고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3:18)고 한 그 시모의 확신에서도 그 자부애를 엿보게 됩니다.
시모 나오미가 어려운 환경에서 외국인 자부 룻을 사랑한 그 사랑의 깊이와 그 사랑의 진실성 앞에 우리는 그저 머리 숙일 뿐입니다. 이것이 가면과 외식과 체면과 이기주의와 타산으로 찌든,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존귀성을 송두리 채 잃어버린 듯한 우리 현대인들에게, 당신과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요!
2. 현숙한 자부 룻
우리는 이방인 자부 룻의 그 시모 나오미를 대하는 한결같은 효심과 효성을 읽을 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하시며 감탄해 하시던 그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며, 또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하고 말하던 하나님의 천사의 음성도 들리는 듯합니다(행 10:4).
룻의 그 시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그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리고 자기 고국과 백성을 떠나 모압 사람을 천대하는 그 시모의 나라에까지 따라 가서, 그리고 그것도 가난한 시모요 또 자기의 장래에 어떤 면에서도 어떠한 약속도 기약할 수 없는 그 시모에게 바쳐졌다는 데에 크나큰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면 룻의 그 시모에 대한 효성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룻은 자식의 도리를 따라 그 시모님을 받들어 섬긴 것을 보게 됩니다.
시모 나오미가 그 자부 룻과 오르바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1:8)하고 기원한 것은 룻이 그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 남편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 가정과 그 시모를 받들어 섬기는 선행을 계속한 것을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옛날 우리나라 어머님들께서 일단 시집을 오시면 일편단심으로 그 남편과 그 시댁밖에는 생각하지 않으시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절개가 곧은 열녀들도 많이 생겨나고 또 그러한 여자들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을 세우고, 열녀비를 세우며, 또 열녀전을 써서 후대에 알리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이 현대인인 당신과 나에게 어떻게 들리는지요! "꼭 그래야만 되나요? 그렇게 하는 것만이 열녀인가요? 열녀가 된다고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라고 항변하는 소리가 벌써 제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이해관계! 이것이 현대인의 심리구조의 기초입니다. 현대인은 매사를 이 이해관계의 기초 위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합니다. 이것은 고부간과 친구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지간에도, 한 핏줄을 타고 태어난 친 형제간에도, 심지어는 부부지간에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미 암 병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말씀으로도 치료할 수 없을 정도까지 왔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무엇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룻은 그 마음이 이해타산을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따른 것은 도리입니다.
도리는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룻에게는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해타산을 할 줄 모르는, 혹은 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사람들에게 "현숙한 자"로(3:11), 또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4:15)로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선행을 귀하게 보셔서 그로 유력한 남자 보아스와 재혼하여 이스라엘의 어진 왕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또 우리 주님의 육신의 조상까지 되게 하셨으니 여러분과 저는 진실한 마음(도리)과 이해타산,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며, 또 어느 것이 참된 이해타산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룻의 그 시모에 대한 효심은 그 시모가 룻에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잘 살라고 했을 때(1:9), 그가 그 동서 오르바와 함께 소리를 높여(1:9, 14) 운 데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이어 말하기를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10)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그 시모에 대한 효심이 자기들의 동족을 버리고 그 시모의 백성에게로까지 가겠다고 했으니 참으로 우리는 그들의 효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그 시모가 다시 두 번째 강력하게 돌아가기를 설득했을 때에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14)고 했습니다. 그 시모 나오미가 계속해서 세 번째 룻에게 설득하기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15)고 했을 때는 룻은 매우 단호하게 말하기를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룻의 시모에 대한 진실한 효심이었습니다. 룻의 그 시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은 그로 하여금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 시모와 동고동락하기를 원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국적까지라도 버리고 그 시모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게 했고, 또 그 시모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모시기를 원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자부 룻은 그 시모에 대해서 부양할 책임을 느껴 그렇게 실행했습니다. 룻은 그 시모에게 "나를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2:2)라고 말했습니다. 모압 여인인 룻이 모압 사람을 질시하는 나라에서 그렇게 한다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착한 여자요 겸손하고 진실한 여자여서 그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5장 3절과 4절에 보면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를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고 했고, 또 디모데전서 5장 16절에는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게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으며 또한 디모데전서 5장 8절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룻은 이렇게 한 것입니다.
룻은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여자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를 밭에 가게 하소서"하고 말한 것을 보면 룻은 자식으로서 부모의 허락을 받고 무엇을 하기 원한 것을 보게 되며, 또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하여 자신의 능력과 용기와 자신감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이고 가난한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따라 지각 있게 행한 것을 보게 됩니다(2:10,13). 그리하여 룻은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신(벧전 5:5)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풍성한 축복을 받은 것을 보게 됩니다(2:14∼16, 4:10∼22). 룻은 매우 성실하고 근면한 여자였습니다.
추수하는 농부들이 그 주인 보아스에게 룻에 대하여 말하기를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2:7,17 참조)고 했습니다. 잠언에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고 한 말씀대로 룻은 높임을 받되 다윗왕의 조상이 되고, 우리 주님의 족보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룻은 그 시모에게 매우 순종적이었습니다. 그 시모 나오미의 지시대로 순종하는 모습은 순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합니다.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2:22)고 한 나오미의 말에 룻은 어떠한 자기의 의견도 내세우지 아니하고 잠잠히 순종한 것을 보게 됩니다(2:23). 그 시모가 3:1∼4까지의 매우 거북한 지시를 내렸을 때에도 룻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행하리이다"(3:5)하고 그것을 아무런 의심이나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3:7∼9). 순종은 신뢰와 존경의 표시이며 또한 사랑의 증거이기도 합니다(고전 13:7). 이것은 상대방의 인격보다도 순종하는 쪽의 인격이 더 좋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뢰와 존경은 사랑과 겸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이제까지 우리는 어진 시모의 그 자부 룻에 대한 사랑과 그 현숙한 자부의 그 시모 나오미에 대한 효성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이 광경을 누가 제일 관심 있게 보셨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 인간의 대소사를 살펴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느라"(2:12)고 기원했던 대로 나오미와 룻은 그 행한대로 보응을 받되 그 "온전한 상"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그 "온전한 상"이 4:11∼22에만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고 마태복음 1장의 우리 주님의 족보에도, 또는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기록이 되어 기념이 되고, 또 계속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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