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나눔터 열국의 어미 -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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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000회 작성일19-11-16 16:53본문
작성자: 박준형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이 말씀이 우리가 연구하여 본받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라가 히브리서 12장 1절에 말씀한 "우리에게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히 11:11, 12) 또한 베드로 사도도 사라를 모든 아내들이 본받아야 할 내면적으로 아름답게 단장한 하나님 앞에 값진, 거룩한 부녀의 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라를 생각하며 그녀의 행실을 주의하여 보고 그녀의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생각할 때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으며 얼마나 아끼셨는가 하는 점에 크게 감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한 자신의 계획을 소중히 여기시듯 사라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 소중한 계획을 위해 사라를 택하셨고 또 사라가 없이는 그 계획이 한치도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를 통해 "큰 민족"(하나님의 지상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고, 또 그 민족을 통해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내시고(롬 9:5), 또 그 구세주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 곧 "천하 만민"(창 22:18)에게 "복"을 베푸실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가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소중하고 막중한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그렇게까지 자기를 소중히 여겨 지키며 처신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전반적으로 그렇게 보셔서 우리에게 그러한 사람으로 제시하여 그녀의 행실을 주의하여 보고 그녀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고하고 계시지만, 그리고 그 권고의 말씀을 합당하게도 여깁니다마는, 우리가 사라의 생애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그때 그때의 그녀의 딱한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아쉬웠던 부분이 없지는 않은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아 애굽과 그랄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남편으로서 먼저 아내의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본분이요 도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사라에게 자기들의 사이가 오누이의 관계라고 말하라고 했을 때, 사라는 그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그르칠 뻔 한 경우라든가, 또는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 여종 하갈을 줌으로써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일을 육체의 힘을 빌려 이루려 함으로써 역시 하나님의 계획을 왜곡시키려 한 점, 등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자매님의 시선을 사라에게서 자신에게로 돌려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자매님들은 지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자신에게도 사라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 2:13)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5-2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일반으로 호소하는 말씀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순간부터 그녀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값으로 산 바 되었으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이 놀랍고 거룩한 사실을 망각한 나머지 자신들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대신에 자기 본성을 따라 행하였으며, 성령님을 좇아 행하지 아니하고 육신을 좇아 행하므로 온갖 성도답지 못한 육신의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따라서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며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있는 사실과 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의 전"인 엄숙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도 사라와 고린도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겨 아끼시고 보호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 아끼거나 보호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생각할 때 크게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믿음의 선진들의 명단에 올려 말씀하고 계신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 12)
우리가 창세기에서 사라에 관한 기사를(창 11:27-23:20) 살펴볼 때 언뜻 생각하면 사라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의 명단에 올려 질 만큼 그녀의 믿음이 그렇게 대단했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대단하게 보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히브리서 11:1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믿음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었는가를 증거 해 주고 계시는데 그것은 곧 사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전 생애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는 데 근거가 있었음을 증거 합니다.
그러기에 사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희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고 말씀하셨을 때 그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또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도 사라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을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장막"에 거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거하는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임했을 때에도 잠시 시험을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는 우를 범하기는 했으나 얼마 후에는 다시 "전에 장막 쳤던 곳" 곧 그들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창 13:3, 4)으로 되돌아왔던 것이고, 또 그 육신적인 조카 롯으로 더불어 분쟁이 있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자기 스스로 무엇을 선택하기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택해주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는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는 자기의 생각과 또 그 생각을 따라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일인지를 뼈저린 체험으로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고 말씀해 주심으로 그가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사라는 이로써 그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반복해서 확인해 주시는 그 약속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그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고 또 되새겼겠습니까! 그러나 그 감격하던 믿음도 달이 가고 해가 바뀌고 또 바뀜에 따라 희미해져서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또 나타나 그 약속을 확인하는 말씀을 해주셔도(창 15:1)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크게 실망하고 체념한 마음으로 아뢰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15:2,3)하고 매우 외람된 태도를 보이긴 하였지만, 그리고 사라도 창세기 16장의 일을 보면 그 남편 아브라함과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격려하시는 말씀, 즉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고 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고 함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했던 것입니다(롬 4:17-22 참조). 창세기 16장에서 사라는 얼마나 크게 그녀의 믿음에 크게 오점을 만들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월은 또 흐르고 또 흘러서 하란을 떠난 지도 어언간 24년이나 되었습니다(창 17:1). 그러나 후사에 대한 징조라고는, 마치 흉년 때에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해만 쨍쨍 쪼이는 것처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창 17:2-4)하시고, 또 사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 16)고 당신의 약속을 재확인해 주셔도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고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해산하리요...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7, 18)하고 다시 또 외람된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끈기있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 17:19-21)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다시 믿음의 용기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창 17:23-27 참조).
그러나 사라는 여전히 그녀의 믿음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고 말씀하셨을 때 사라는 그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하고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3, 1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사라는 결정적으로 그녀의 의심의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마침내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창 21:2) 낳아주게 되었고 사라는 기쁨에 감격된 마음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 21:6, 7)하며 의기양양해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앞의 말씀을 통해 사라의 믿음의 그래프를 조사해 볼 때 그녀의 믿음이 곡선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항상 또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사라는 그녀의 육십 여 년 간 신앙생활을 통해서 단 한 번도 그녀를 불러 약속하신 것을 불신 할 만큼 하나님 자체를 버리거나 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사라가 믿음의 길에서 방황한 적은 있었으나 그녀에게 약속하신 이의 미쁘심을 앎으로 그 길을 떠난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 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는 믿음이라 믿는 자의 어느 한순간 순간의 영적 상태나 믿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변화된 믿음의 사람의 경향 또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가지보다는 둥치를 보시고 평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사는 날 동안, 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전 생애를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는 믿음이 붙들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헛되지 아니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계획하신 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잉태하는 힘을 얻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얻게 해주었으니 이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큰 상과 얼마나 큰 업적을 남기게 하였습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다음의 권면이 얼마나 합당합니까!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5-38).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세 번째로 사라의 생애를 생각할 때 또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모든 아내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아내의 모델로 부각시키고 계신 사실입니다(벧전 3:1-6).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 3:1-6).
물론 사라가 완전무결한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과 같이 이 아름답게 단장한 거룩한 부녀 사라에게도 결점이 없지는 아니했습니다(창 16:1-6과 창 18:1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믿음을 보실 때 그녀의 믿음의 가지보다는 둥치를 보시고 그녀의 믿음을 평가하셨듯이 사라의 아내로서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녀의 이따금씩 나타나는 약함 보다는 그녀가 평소에 남편을 대하는 자세를 보시고 그녀의 아내로서의 됨됨을 높이 평가하신 것같이 보입니다.
베드로전서 3:1-6의 아내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라의 아내로서의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그녀의 남편을 대하는 근본 자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성령님께서 사라를 아름다운 아내의 모델로 말씀하실 때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라는 평소에 마음으로 그 남편을 자기의 머리 또는 "주인"으로 여겨 스스로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권위 밑에 있기를 즐겨한 것입니다. 창세기 18:12에 사라가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 부를 때의 배경이 그것을 증거 합니다. 왜냐하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인"이라 부를 때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혼자의 말로 "속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그 남편을 자기의 "주인"으로 여겼다는 것은 역으로 사라가 자신을 그 남편의 "계집 종"의 정도로 자기를 낮추어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사라의 자신에 대한 그 겸허한 태도와 또 그 남편에 대한 그녀의 존경심과 경외심이 그녀로 하여금 그 남편에 대한 순결한 마음과 부드럽고 따뜻하며 보살피는 마음과 순종하고 복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내가 남편을 자기의 "주인(머리)"으로 받아드릴 때 자신을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아내가 되게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엡 5:15-24, 33, 골 3:18, 벧전 3:1-6).
독자 자매님 여러분도 사라처럼 그대의 남편을 그대의 "주인"으로 여기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어떠한 부당한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의 남편을 변함없이 선대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믿음과 행실 면에서 사라의 딸이 된 것입니다. 즉 그대는 사라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거룩한 부녀", 곧 "하나님 앞에 값진" 아내가 된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라를 생각할 때 또 감명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은혜"로 비유하여 그녀로 말미암아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갈 4:21-31).
아브라함의 두 아내, 또 그 두 아내를 통해 난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비유)의 중요성을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 그 비유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될 때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바대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30).
그러면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두 아들은 누구며, 또 그들이 비유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두 아내는 사라와 하갈이고 두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본처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유하는 여자"요 하갈은 그 "계집 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첩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과는 무관한 자요 자유가 없는 종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갈 4: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갈은...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갈 4:25) 하여 하갈이 모세의 율법을 비유하고 있음과 동시에 또 그녀에게 율법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녀들도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 "육체를 따라 난 자"(갈 4:29)라고 하여 "성령을 따라 난 자"(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와 구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고도 말씀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이에 반해 사라에 대해서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 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갈 4:26, 27)고 말씀하여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자유자", 또는 "우리 어머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사라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로 구성된 참 교회(히 12:22-24 참조)로 비유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갈 4:25) 곧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려하는, "육체를 따라 난 자"들로 구성된 거짓 교회와 대조하고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라를 "자유자"라고 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종이 아니요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 7)고 함과 같습니다(롬 8:16, 17).
또한 사라를 가리켜 "우리 어머니라"고 하여 사라가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라가 "잉태치 못한 자"요, "구로치 못한 자" 곧 "홀로 사는 자"로되 어떻게 어머니가 되었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그 어머니의 자녀들이 되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사라가 나이 구십이 되어 그녀는 생리적으로 아기를 잉태할 수 없는 "죽은 자와 방불한"(히 11:12) 여자였기에 성령님께서 사라를 "홀로 사는 자"로, 또 하갈은 아브라함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기에 "남편 있는 자"로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소생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데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은혜와 긍휼,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엡 2;4, 5)이 필요했을 뿐 아니라(엡 2:1-9) 또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고전 2:4, 5)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살전 1:5 참조).
다시 말하면 사라가 어머니가 되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머니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은혜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딛 3:5-7 참조). 이에 우리는 주님께서 강조 하신 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닐 우리는 왜 거듭나지 못한 자, 곧 "육체를 따라 난 자"가 거듭난 자, 곧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그렇습니다. 사단과 세상과 육신은 "그때"나 "이제"나 변하지 아니했습니다. 지난날의 아벨을 핍박한 가인과, 이삭을 핍박한 이스마엘과, 야곱을 핍박한 에서와, 그리스도를 핍박한 유대 종교와, 스데반과 초기 성도들을 핍박한 유대 종교인들과 이방인들, 중세기의 성도들을 핍박한 로마 카톨릭교와 이교 로마제국, 근세의 성도들을 핍박한 국교도들과 공산주의자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자들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 있으며, 앞으로도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주위를 떠나지 아니할 것입니다(마 5:10-12, 마 10:28-39, 요 15:18-16:4, 33, 행 5:41, 42, 히 10:32-39, 히 11:24-27, 히 11:35-38, 히 13:12, 13, 벧전 4:12-19, 계 2:8-11).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독자 된 여러분 자매님들은 어떻습니까? 자매님은 "자유하는 여자" 곧 사라의 자녀가 틀림없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자매님도 바울 사도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나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갈 4:31), 곧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확실히 간증할 수 있는 분들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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