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 곡식과 가라지(The Wheat and the Ta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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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655회 작성일19-11-16 17:14본문
곡식과 가라지(The Wheat and the Tares) (마13장)
요한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번역: 여 성 모(한국 엠마오 성경학교)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에는 무엇인가 놀랍도록 은혜로우심이 있습니다. 놀랍게 은혜로 교훈하시는 이 방법은 신자들의 사랑과 감사의 감정과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의도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놀랍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의도에 비하면 우리 믿는 자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야기 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즉 믿는 자들 곧 신자들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 다른 것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놀랍도록 다양한 방법과 수단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믿는 자들을 축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믿는 자들의 부족함 중에도 계속해서 역사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고 있음을 알고 있고 자신들이 이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 자인가를 깨닫고 있다면, 믿는 자들은 진정 스스로 애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는 자가 그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믿는 자들의 기업이요, 분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풀이 죽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정욕 등에 억눌려 스스로 풀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합당한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9).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여러 가지 필요에 대하여 그기에 합당한 말씀을 정확하게 적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실 수 있는 자신의 배려를 절대로 거두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필요를 알고는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끊임없이 믿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은 한심하게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의기소침하고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그들에게 쉼 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 되시는 분으로서, 불쌍하고, 연약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죄인들에게 보내어지셨습니다. 이는 저희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불쌍하고 풀이 죽어 있는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은 이와 같이 부요하신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님에게 더욱 더 밀착하게 되고 그분과 견고하게 연합되어 있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 때 믿는 자들은 불쌍한 죄인이었던 자신에게 이렇게 교훈해 주신 하나님의 특성이,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이제는 믿고 있는 믿는 자신을 인도하시는 방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이 때 자신의 슬픔과 비탄들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과 은총의 분명한 증거라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긍휼을 입기 전 그리고 긍휼을 입고난후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믿는 자들은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인도하시는 방법, 우리 믿는 자가 위치한 특별한 환경들, 우리 믿는 자가 부딪치고 있는 상황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계획하신 신령한 교훈의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들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도 현재 자신을 거스리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필요한 많은 교훈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때로는 그를 그냥 그 자리에 두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상태로 구성된 이 세상은 우리가 영광의 나라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교육받습니다. 믿는 자의 부족함, 약함, 열매 맺지 못함,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를 가장 감동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여기 부족함과 연약함과 열매 맺지 못함과 심지어는 죽음 중에서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증거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용서와 자유를 얻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를 소유한 우리 믿는 자들의 연약함과 결점들과 심지어는 악행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처한 모든 특별한 환경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적의감이 전혀 없고, 성급한 말씀이나 그와 같은 성급한 기색도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그분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은 사랑일 뿐입니다.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많이 끌어당기는 것은 자녀의 연약함과 부족함입니다. 부모의 애정은 자녀 모두에게 동일하지만 다양한 상황들에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자녀의 길고 연약한 아동기는 부모의 섬세한 동정과 주의 깊은 보호를 필요로 하며 자녀의 부모에 대한 애정을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우리의 연약함과 유아와 같은 무력함 중에 있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랍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깊은 보호와 훈련을 받으며 발전하여 성숙함에 도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배우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두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는지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믿는 자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감각하다면 그는 참으로 비참할 정도로 스스로 열등한 상태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감각하고, 이 땅에서 우리 주위에 있는 것에 너무 몰두하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위치한 환경들보다, 또는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상황들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결코 건강한 상태에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계획들을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을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알려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던 비유들을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이 13장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증명되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곱 개의 비유들을 발견합니다. 이 비유들은 전에 주지된 바 있지만 그 순서를 다시 주목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 같이 천국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왕국의 (기능, 작용) 행위와 그 독특한 결과들에 대한 선언입니다. 즉 승천하시기 전에 인자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행위와 그 결과, 그리고 역시 승천하신 후에 뿐만이 아니라 승천하시기 전에도 개인들 각각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그 행위와 그 결과들에 대한 선언입니다. 천국은 이 왕국 행위의 결과로서 오는 것이며, 새로운 체계가 수립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결과였습니다.
나머지 여섯 개의 비유들은 동시에 말씀된 것이 아닙니다. 세 개의 비유는 무리에게 말씀되었고 세 가지는 제자들에게만 말씀된 것입니다. 이 비유들 중에 앞의 세 가지는 세상에서 천국의 공적인 특징과 결과를 나타내고, 뒤의 세 가지 비유들은 천국의 본질적인 가치와 하나님의 장중에서 완전한 발전과 결과들을 상징합니다. 전자는 세상에 나타나는 천국의 표면적이며 가시적인 나타남을 제시했고, 후자는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 자체의 실제적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네 아버지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천국이란 표현은 특별히 세대와 예언적 증언의 복음서인 마태복음에서 독특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있는 동안 믿는자는 어떤 상황에 있을까요? 믿는자는 이곳에 계시지 않고 천국에 계신 주님과 친교를 유지하며, 이곳에서 주님의 가족을 만들고, 또한 주님의 나라를 만들며,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동안, 단지 땅에서의 축복들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도들이 주님께서 그들은 아시는 것처럼 주님을 주님 계신 그대로 알게 되고, 영원히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를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 바이며, 그들은 “좋은 씨,” 즉 살기 위해 땅에서 떨어져 죽는 “알곡”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로 그 상황에 인도되었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24-30절과 36-45절에서 우리는 이 비유, 그리고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이 비유의 의의를 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그 자체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실제적인 사실로 우리 앞에 단순하게 제시됩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결론은 제쳐놓고,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3:38). 이 역설적인 표현들에는 의미의 완벽한 조화와 일치가 존재합니다. 만일 오직 성경에 비추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 나오는 동일한 말씀의 동일한 의미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구주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밭은 세상이요.” 밭의 의미는 다름 아닌 세상입니다. 이 의미는 우리 앞에 여기에 기록된 일이 일어나는 현장 또는 장면을 제시하니, 곧 “세상”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자신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인물에 대한 시각을 제시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인물은 인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가 뿌린 씨는 좋은 씨였습니다. 그 좋은 씨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밭에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밭은 세상입니다. 그 분은 이 밭에 주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밭은 그 분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즉 세상은 밭이고, 밭은 예수님의 소유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밭에 좋은 씨를 심으셨습니다. 전에 그 밭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좋은 씨)이 심겨졌고, 그 땅에 자생하지 않은 것(좋은 씨)이 심겨졌습니다. 따라서 그 씨는 유대 민족이나 체제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 또는 유대 체제는 여기에서 암시되는 인자의 사역 시기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세상은 씨가 뿌려져 성장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심겨지지 않았던 좋은 씨가 이제 뿌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즉 좋은 씨가 세상에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분명하게 이 새로운 조직 안에 들어온 사람들 이외에) 세상에 이 좋은 씨다운 것을 볼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세상이 좋은 씨가 심겨진 밭과 같이 보이십니까?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특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세상이 좋은 씨가 심겨진 밭과 닮아 있지 않았는지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 분의 것입니다. 즉 세상은 인자의 밭입니다. 이 사실은 교만하게도 세상의 어떤 부분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상 전체를 소유하려고 하는 자들의 지혜와 권력을 좌절시킵니다. 성경은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묘사 합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막 12:7). 세상은 결코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파기할 수 없는 권리에 의해,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명백한 자격에 의해 세상은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입증될 때 분명히 자긍하는 자, 세상의 일부분을 자기 것으로 요구하는 자, 세상을 자기 것으로 칭하는 자의 교만이 꺾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자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인적인 권리로 세상의 소유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자는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쓸데없이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적법한 소유주이신 그리스도에게 그것들에 대한 사용 내용을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입니다. 이 세상은 밭이고, 그 밭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에서 우리는 이 변화의 특성과 상황을 봅니다. 이 사람들 곧 이 농부들은 위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악한 씨를 들여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영혼의 원수의 끈질긴 악착스러움에 대해 너무나 모릅니다. 바로 사람들이 자는 동안 이 영혼의 원수는 악을 행합니다. 그 악은 얼마 동안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원수는 악한 씨를 뿌렸고, 그 악한 씨는 곧 싹이 틀 것입니다. 사단은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씨에 의해서도 막지 못합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악을 무효화하십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지가 뿌려졌고 싹이 난 것은 사실입니다. 가라지들은 금방 눈에 띠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 가라지들은 땅에 존재하며 땅의 많은 부분이 가라지들에 의해 점령됩니다. 사람들은 자고 있었고, 원수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가라지들이 지금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히 영적 분별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땅이 가라지들로 더 황폐화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계속적인 세심한 경계가 얼마나 필요하지 모릅니다! 우리가 깨어 우리 자신이 속한 자리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곡식과 가라지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영원한 경계의 벽이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많은 도덕적 악이 묵인되고 있는 사실이 슬프고 비통한 경험에 의해 입증되지 않습니까? 신자들 중에 매우 악하고 저열한 상태가 허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혼동되어 주님의 역사가 명백하게 축소되고 위축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원인을 찾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그 원인 전체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잠이 들어 원수를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원수는 주님의 원수입니다: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시 74:22).
주님께서는 자신의 대의와 자신의 백성의 대의를 알리십니다. 주님의 백성은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원수는 주님의 원수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형제”라고 칭하십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선포에서 많은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전투가 주님의 장중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들은 이 짧은 “그의 원수”라는 말을 큰 기쁨으로 봅니다. 만일 우리의 부족한 것들과 실패들에 대하여 알고 있고,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원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수치로 가득할지라도 치료를 바라십시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짧은 말에서, 이 원수가 주님의 원수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이 원수를 대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배울 것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이것은 원수의 성공적인 결과였습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싹이 나고 결실했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구분이 없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섞였습니다. 현재 상태를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에 대한 구제책이 없었습니다. 세상을 즉각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불신실한 청지기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태만하여 원수가 들어오게 하였고 밭에는 가라지가 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 일로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종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이 좋은 씨를 뿌린 밭을 내려다보시고 그 밭에 가라지로 가득한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가라지를 뽑아버림으로 세상을 정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님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종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것은 인간의 지혜에 따르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이단들을 뽑아 근절하고 자신들의 바라는 대로 악을 제거함으로 세상을 다시 정돈하고 싶어합니다. “가만두어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너희가 행한 이 제안에 동의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이 있다. 곡식과 가라지는 현재 함께 있으므로 그들이 함께 자라도록 두어라. 만일 내가 너희에게 가라지를 뽑는 권세를 준다면, 너희는 자신도 알지 못하게 곡식을 함께 뽑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39절에서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용어는 앞에서 “밭은 세상이요”라는 말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의심할 나위 없이 (문자적 번역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시대 또는 세대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추수 때는 세대의 끝이요”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첫 번째 예에서 단순하게 “세상”이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즉 세상이 이 위대한 역사의 무대입니다. 이 의미는 장소라는 관념과는 거의 무관하고 이렇게 나타내어지는 때 (time)-즉 시대 또는 세대의 끝-라는 관념을 전달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즉, 곡식과 가라지가 모두 자라나 작업하기에 적합할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먼저 가라지를 불사르기 위해 단으로 묶는 광경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곡식을 모아 곳간에 넣는 광경을 제시합니다. 그 다음은 가라지의 파기입니다. 우리 주께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 (주님의 섭리의 목적들의 전달자들, 사역자들, 그리고 특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다음에 (즉 가라지를 불사른 후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이것이 순서입니다. 가라지는 단으로 불사르게 하기 위해 단으로 묶여지고, 곡식은 곳간에 저장됩니다. 그 때에 가라지의 파기, 또는 완전한 소멸이 있고, 마지막으로, 즉 가라지의 멸망 다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말씀된 세 번째의 비유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 와 유사한 표현들을 다음과 같이 사용하시는 것을 봅니다: 천사들이 지금까지 함께 섞여 있던 두 무리를 구별하여 악한 무리는 내버리고 선한 무리는 그릇에 담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의-하나님을 향해 산 사람들의-방해받지 않는 축복을 제시합니다.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바로 성도들이 심히 갈망하던 일입니다. 지금 세상의 처지가 이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 줍니다. 성도들은 가라지가 불법 가운데 빠르게 익어 가고 있는 것을, 멸망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익어 가는 것도 봅니다. 비록 지금은 이들이 분명히 그리고 슬프게도 구분되지 않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추수를 위해 그들을 익히고 있으며 결국 그 때가 되면 그들을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멸망을 위해 함께 숙성되는 나름대로의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런 진행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닥칠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하고 급작스러운 천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4-20을 읽어보십시오. 그 때에 자신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르익은 가라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법으로 자신을 강화하고 하나님의 섭리 자체 (그들이 단으로 묶여지는 것)를 자신들의 힘과 권세의 기회 자체로 여깁니다.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시 9:15)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잠 11:21). 그 큰 날에 곡식은 세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곳간에 모입니다. 그들은 특별하게 들림을 받습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리니” (살전 4:17). 그들은 주님의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마 13:43).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미래에 나타날 결과인 그 축복의 완전한 특성이 증명될 것입니다. 넘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 내침을 당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모든 불법이 불살라 멸망할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안전하게 곳간에 간수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은 빛날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 때에 의인들은 빛나리라.” 그러면 누가 의인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특성은 우리의 의(義)이신 주님처럼, 그리고 “의로운 해”로 공표됩니다.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삼하 23:4). 그런데 이 다윗의 말 마지막에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하실 때의 영광에 대한 묘사와 함께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광경도 봅니다. 이 말은 본문의 말씀과 유사하며 동일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즉 그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분의 가르침과 간청에 의해 이끌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리로다 하니라” (삼하 23:6, 7). 즉 가라지의 불사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들이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불사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태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의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양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해같이 빛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옛 성도들도 이 축복을 예상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말에서 이 축복을 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이것이 다윗이 고대하고 있던 일입니다. 즉 해처럼, 의인처럼 빛나는 것, 즉 하나님의 명예가 설욕되고, 사단과 그의 군대들이 내침을 당하고 하나님의 원수들이 멸망을 당하고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만족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강하게 이와 같은 표현을 합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1). 즉 내가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 해처럼, 의로운 해처럼 빛날 때입니다. 이것이 지금 성령 안에서 내가 보는 바이고, 이것이 지금 내가 믿음으로 신앙하는 바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고대하는 바이니, 곧 예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영광을 추구하는 진지한 호흡, 이 일들을 누리는 이 감수성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일들은 많은 기쁨-매우 실재적이며 깊은 위로-을 가져다줍니다. 즉 지금 불경한 세상에 임박한 천벌의 먹구름이 그들에 대한 심판의 비를 쏟아 내릴 때, 우리는 해같이 빛나게 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먹구름이 이르러서 퍼져 나감으로 모든 악을 내쫓을 때 그 때 의인은 번창할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의 큰 기쁨의 때가 이를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 일들이 믿는 자의 심령을 즐겁게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버지의 나라”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이 적절하고 정교한 말씀에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큰 축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위치-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버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위치-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결과를 봅니다. 즉 믿는 자들은 의로워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즉 의로운 해처럼 빛나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2). 주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앙망하라고 명하심으로 자신을 그들과 일체가 되게 하십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히 2:12).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요 20:17).
기대 가운데 기다리고 있는 믿는 자들에게 큰 위로로 충만하게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사랑했던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며, 둘째로, 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발견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기뻐하고, 다급해 하고, 찾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만일 그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을 더 이상 슬프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때에 여러분이 취하게 될 여러분의 고귀한 특권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의 앞에서,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 아버지와 영원무궁토록 교제를 가지며,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분깃입니다. 심지어 이 땅에서도 향유하라는 부르심을 받는 분깃입니다. 왜냐하면 이 분깃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보관된 기업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기 위해 보관되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은 주님을 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부를 얻기 위해-신부를 자기에게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 신부도 자신이 계신 곳에 있게 하기 위해-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요 17:24). 주님 안에서 교회는 완전해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 1:22).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회의 자리이니, 한 몸, 한 마음, 만물에 있어 하나, 기호에 있어 하나, 소망에 있어 하나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은 주님께 속함으로 가장 축복되게 아버지의 사랑을 맛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쁨과 기업을 얻으려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이 사랑을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느낍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요 16:26, 27). 만일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낙담하거나 신령한 기쁨의 표면을 떠돌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 축복을 향해 우리의 생각을 높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여러분의 걱정이나 여러분의 갈등이 무엇이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순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분깃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여러분을 용기를 꺾습니까?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느낌입니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계속 침체시킵니까? 죄악된 세상입니까? 죄악된 세상은 여러분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죄악된 세상이 여러분의 원수라는 그 사실은 가장 큰 기쁨의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원수는 정복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의 원수라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세상이 주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여러분은 주 예수님과 같은 입장이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한 편이 되어서 하나의 공동의 원수와 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싸움에 대해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평안을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에 의해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자신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의 결과를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여러분이 그렇게 사랑을 받고 이 땅에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게 된 사람들 중에 속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여러분이 해 같이 빛날 때 여러분을 기다리는 행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진실로 그 날에, 우리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뵐 그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복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되고 그 다음에 주님을 있는 그대로 뵐 것입니다. 그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이 되겠습니까! 바로 모든 환난과 싸움이 끝난 다음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깨어날 때입니다 (시 17:15).
믿는 자들이여, 주님을 만난다는 이 사실에 여러분의 기쁨을 일깨우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신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신 분을 사랑합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엡 4:10). 여기에 하나님의 성자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성자께서는 자신을 낮추사 인간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셨고, 그들의 슬픔과 불행을 짊어지셨고, 그들의 기쁨과 위로를 충만하게 하셨고 그들에게서 죄를 영원히 제거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기쁨과 확신은 동일하신 주님께서 하늘 위에 오르사,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자신과 그들의 원수를 멸하셨다는 것입니다. “안심하라” (막 6:50)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하나님의 지혜가 곧 세상에 나타나 반대하는 모든 것을 멸하신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정선되어 가려낸 모든 불법이 완전무결하게 일소될 세상을 얻기 원하십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공중으로 내려오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 여러분의 심령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까? 진실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지금 오시기를 바라십니까? 예수님께서 금방 오려고 하시고, 예수님의 성도들이 완전히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할 때, 예수님의 성도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섞여, 그들의 습관들이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나, 그들의 만족을 행하고 있다면 얼마나, 진실로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주의 형상과 더 순전하고 완전하게 일치하는 자리로 인도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세상의 불만족스럽고 부정한 욕망들로부터 정결함으로 받아 여러분의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만날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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