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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열 처녀의 비유(The Ten Vir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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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432회 작성일19-11-1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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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The Ten Virgins) (25:1-13)

 

요한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여 성 모 번역(한국 엠마오 성경학교)

 

이 세상에는 우리가 만나 볼 수 있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진리와 구원의 길을 결코 들어 본 일이 없는, 그래서 분명히 이 구원의 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이 진리와 구원의 길을 듣고 이것을 받아 드렸노라고 분명히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도 이 도(way)를 받아들이는 근본 원리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번째 부류에 속한 자 중 한 부분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일반적인 특징을 성경 말씀에 질책하여 잘 요약하고 있는데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1: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 중 그 나머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마음과 진실된 마음으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보기를 바라는 것인데 요한복음 33절에서 선포하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어지는 5절의 말씀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조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나라와 이 왕국에 들어가는 출입구를 인식하는 능력은 거듭남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새로 태어남'이라는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지켜온 자기의 견해, 욕망, 감정의 변화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이 새로 태어남, 즉 거듭남이란 진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하나의 중대한 변화로 일컬음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새로운 창조적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남이란 "옮기어 짐"을 말합니다 -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13) - 마태복음이 현저히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그 옮김, 즉 이전과 전혀 다른 위치로 우리를 내려놓음을 말합니다.

 

주 예수님은 사복음서 저자들의 조명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점으로 증거 되고 있습니다. 즉 이렇게 성령께서 즐겨 각각 다른 관점에서 주님을 조명하여 나타내신 이유는 구주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더욱 충만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축복을 충만케 하시기 때문에, 영존하시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모든 위대하심과 지혜와 사랑, 그리고 권능의 축복이 우리 주님 안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이 모든 축복이 내재하고 있으며, 주님을 알게 된 믿는 자의 경우에는 주님을 알게 되어 다음과 같이 되게 되는데, 믿는 자의 기쁨은 자기의 마음을 그리스도에 고정해 노음으로써 만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과 일체감을 갖고 있을 때, 비로소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며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끌어당기는 인력의 한 중앙에 있으며, 믿는 자는 최상의 기쁨의 대상으로서의 우리 주님의 주변을 공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든 임무와 사역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를 갖고 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주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하는데, 마태처럼 주님의 혈통을 추적하여 계보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계보를 거슬러 원조를 찾아 올라가서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여 우리 주님을 부지런히 그리고 쉬지 않고 선을 행하시며 모든 의를 이룬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메시야로, 모든 예언의 대상으로, 그림자의 실체로 그리고 모든 유대 종교예식의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대하던 자손이요, 옛 것의 원형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로서, 마태복음에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육신에 따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관한 언급은 이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에게는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11절에서 우리가 크게 주목하게 되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 말씀하신 곳에서 천국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모든 유대백성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이 땅에서 왕국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수치를 당하며, 오신 그 오심을 예언한 모든 예언의 말씀을 그들이 전적으로 간과했음으로 당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천국 비밀에 관한 주제는 이제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이 비밀의 왕국이 유대인들이 거부한 주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동안에 어떻게 건설될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비밀한 가운데 존재하는 왕국의 존속기간은 하나님의 목적하심이 발전하여 성취되는 기간으로 인자로 오신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으신 때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까지, 즉 의인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 어떠한 자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이 왕국, 즉 의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이 해처럼 밝게 빛날 그때까지의 기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왕국이야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에 속한 자들과의 완전하고도 철저한 분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현재 서있는 그들의 지위는 어떤 것입니까? 그들의 타고난 실질적인 지위란 어떤 것입니까? 그들이 처한 지위란 단순히 하나님과 적대적인 상태에 있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거룩함으로부터 분리되어 비난받아 마땅한 입장이나 공개적인 반항이나 분노를 표출하는 그러한 입장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면전에서 아주 완전히 쫓겨난 상태,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존전에서 '확실히' 거듭 말하거니와 '확실히' 쫓겨난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3:2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그의 무죄한 상태와 그 정결함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 없는 세상에는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못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의 평이한 계명이 사람에게 주어졌는데,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이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 실과를 따먹는 것에 관한 사실 그 자체는 단순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대한 결과를 수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이 사건이 조그만 하다 하는 사실이 오히려 율법을 범한 죄성을 더욱 가중시킨 것입니다. 사건 자체로서 우리가 바라본 그 행동은 사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행위는 현존하는 상황에서 천국 권위에 가할 수 있는, 있을 수 있는 모든 모욕적인 행위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동기 유발의 정도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죄의 유죄성의 정도는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이와 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 이 세상은 이와 같은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때 그 죄인 된 상태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라는 말씀과 같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세상은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난 상태에 처해 있으며 수고와 슬픔과 죄와 고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악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일이며 하나님 안에서 시작될 수도 없었습니다. 즉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로 인하여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여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있어야 할 반응, 즉 정결한 상태로 회복과 같은 반응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다시는 죄가 없는 세상으로 될 수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일단 죄를 지었던 자는 결단코 다시는 순수한 죄 없는 자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무죄함의 바로 그 근본이 한번 그 정결함을 잃어 불결하게 되었다면 도저히 다시는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무죄함이란 한번 그 무죄함을 잃어버리면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만이 이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 죄를 없이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함으로 한없는 자비가 있는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 가운데 새로운 세대(역자주: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과정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구분 가능한 하나님의 경영 또는 통치방식)를 펼치시고 한 왕국을 건설한 다음에 이 세상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대에 건설한 왕국에 합당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를 지었지만 그저 죄인의 상태 그대로 내버려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며 자신의 계획하심을 이 세상으로 하여금 다 알게 하였습니다. 처음에, 아담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네가 어디 있느냐" (3:9) 라고 부르실 때에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드러내어 밝히 보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노아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부르심 가운데 있게 하여 홍수 이후에도 교회의 모형이 되도록 방주를 통해 노아를 보존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유대 백성을 부르셔서 율법을 주시고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의 대상으로서 모형과 예식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을 나타내신 이 모든 하나님의 드러내심도 한낱 사람 마음의 완전한 적대행위를 훨씬 더 눈에 띄게 드러내게 하는데 불과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 성경에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20:13)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단계에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들은 사단과 동맹을 하여 훨씬 결의에 찬 적대 행위와 훨씬 더 지독한 악의에 찬 행동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위치에 서서 극도의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때에 이 세상이 품은 생각은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20:14)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결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런 패륜적인 불법 행위가 나타났을까요?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하심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의 부족을 채워 주시고 그들의 죄를 없이 하고자 하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겠노라고 악을 쓰며 큰소리로 외칠 바로 그때였습니다. 주님께서 화목하기 위하여 그리고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사랑의 온유함을 보이기 위하여 오셨을 때, 바로 그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을 그들 가운데서 제거해 버리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고난 가운데 오시며 그들의 사악함 속에 있는 이 세상의 조롱 가운데 오셨을 때 그들은 우리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우리 주님을 이 세상에서 좇아 내버렸던 것입니다.

 

한편 이와 같이 사람이 행하는 최후의 발악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그들의 반항을 아니, 심지어 그보다 더한 도전적인 태도를 보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굴욕 당하심을 절호의 호기로 이용하여 주님을 모욕하며 경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우리가 지금 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을 몰아내듯 쫓아내었습니다. 성경에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 하노이다"(19:14)한 말씀은 실질적으로 우리 주님을 쫓아내는 결정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한편 믿는 자들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사랑 그리고 관심에 있어서까지, 이 세상이 결의에 찬 적대행위를 하는 그 대상이 되시는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자들입니다. 즉 이 세상이 그들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는 이 왕께서 이 믿는 자들이 모셔 섬기는 믿는 자들의 왕이 되십니다. 믿는 자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임을 알며, 이 세상은 모든 정의와 진리를 거절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았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 자신이 직접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함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19:30)라고 외쳤을 때 심판은 이미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행위 속에 그들에 대한 심판이 봉인되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대항하여 가장 결의에 찬 그리고 가장 철두철미한 사람의 적대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실 때, 그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사람의 악의가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이에 더 나아갈 수는 없는 그곳에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났습니다. 죄가 더하였다 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넘쳤습니다(5:20). 사람 쪽에서 극악무도한 적대행위를 보여준 바로 그 행동이 하나님 편에서 최고의 사랑의 문을 열어젖히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죄와 사랑이 만납니다. 말하자면 각각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끌어 당겨진 한 점 곧 한 중앙에서 죄와 사랑이 조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우에서 사랑은 승리를 얻었고, 죄를 이겼으며 영원한 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한 심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믿는 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심판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16: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어서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시리라 ...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16:9,1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믿는 자들은 그들이 심판받은 세상에서 즉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선고를 받았지만 형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형이 선고되고 나서 최종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중간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사람의 맹렬한 분노를 나타내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믿는 자는 그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열납 되어진 자 임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믿는 자가 기쁨을 얻고 그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타락한 악행에 대하여 자비하심으로 넉넉히 초월해 있으시며 사람이 행하는 극도의 증오에 대하여도 사랑하심으로 넉넉히 이기셨습니다. 그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 그들은 가장 혐오스러운 범죄의 극치를 보였으며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서 이 죄를 다루어 모든 깨끗치 못한 것들을 정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이 열처녀의 비유로부터 이 세상에는 믿는 도리에 있어서는 하나님 백성과 연합하여 있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 백성에 속한 자인 체 하면서도 실제 모습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주님 보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조차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그들의 심령이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들은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속히 오소서"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12:45, 24:48)고 외치고서는 그들 자신의 쾌락에 깊이 빠져 계속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이런 종들과 많이 닮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을 갈망하여 기대하고 있는 가운데 기다리고 있는 기다림이 갖는 기쁨과 환희 그리고 천국 행복의 어떠함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처녀의 이야기 속에서, 심지어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자로 믿어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런 형태의 믿는 도리가 나아갈 수 있는 한계에 대한 한 증거를 갖게 됩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있었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에 해당하는 그들 모두도 신랑을 맞으러 나아갔습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동일한 목적을 갖고서 그들 모두 나아간 것입니다. 그들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똑같이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다 증거의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그들은 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다르단 말입니까? 바로 이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신랑을 영접하는데 꼭 필요한 단 한 가지를 아니 유일한 이 한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그들을 이 주인에게 적합한 짝이 되게 할 수 있는 바로 이것을 그들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유일한 것이란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 빛을 수여 받는 것, 하나님 곧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영혼을 충만케 해주며, 신랑의 모습이 영광의 광채 속에 나타나심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쁨의 기름 곧 성령의 기름이 그들 슬기로운 처녀들의 영혼 속에서 만들어 낸 열렬한 사랑의 결정체가 그들 어리석은 처녀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이 갖고 있지 못한 반면에 믿는 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인 이 세상을 구별하는 커다란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25:6) : 하늘나라에 속한 슬기로운 처녀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이 슬기로운 처녀들은 비록 그들 속에 많은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자신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사랑하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서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는 이 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미련한 처녀들도 그들의 등을 준비하였지만 이 극적인 순간에 그들의 등불은 불이 켜지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에게는 달리 아무런 구제의 방법도 없단 말입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섭게 선포하신 말씀에 일렀으되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22:11)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 완전한 구별이 이루어집니다. 그들의 목적, 소망 그리고 그들의 교제는 완전히 다르며 즉, 다른 정도가 아닌 정 반대이므로 결코 융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세상에 속한 것이며 다른 한쪽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즉 한쪽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소생케 되며, 다른 한쪽은 불사르게 하기 위하여 보존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라지는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13:30)

 

그렇다면 알곡이 왜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은혜의 증인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주님의 소유가 되어 지고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이들과 영광스러운 머리되시는 주님 사이에 분리되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증인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듯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17:23)인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의 주님을 거절하여 주님을 세상 밖으로 내어 쫓듯이 몰아낸 범죄에 대하여 유죄로 선고받은 이 세상 가운데서 믿는 자들 여러분들은 이와 같이 구별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심판이 결정되고 그리스도의 성도들 가운데 최후의 성도가 곳간에 모아 넣어질 때까지 그 형 집행이 보류되고 있는 심판받은 이 세상 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이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 느끼는 것들, 바라는 것들과 연합하여 아니 이들 모두와 함께하는 모양과 연합하여 살고 있으며, 또한 살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믿는 자의 기쁨은 주님의 영광이 됩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주의 대적과 연합되어 있는 세상, 그 어디에 주의 영광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어느 곳에도 주의 영광은 없습니다. 주의 오심을 기쁨으로 바라보는 성도는 느낌이나 바람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하는 자이며 주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 자신에게로 영접하기 위하여 오실 그때를, 이어서 주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들이 말끔히 청소되어질 그때를, 그리하여 주님의 백성들이 주와 함께 다스릴 그때를 지금 묵상해 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모든 것들, 즉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가 오시는 그 찬란한 보습으로 인하여 멸망해 버릴 그때를, 그리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의 입으로 숨만 한 모금 들이켜 쉬어도 삼키어 없어질 그때를,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묵상하고 있습니까? 그때에는 우리 주님을 거스리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주님과 함께 거기서 더 이상 같이 거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야말로 성도의 완전한 기쁨이 됩니다. 이 일이야말로 성도가 찾고 갈망하여 서두르고 있는 바로 그 일이며 곧 우리 주님의 오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진정한 바람이 되고 있습니까? 이런 바람은 여러분의 몸에 밴 체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체하지 마소서,' 다시 말하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천국 주인이자 천국 신랑 되신 분에게 훨씬 더 합당한 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나타나실 때 여러분의 주님을 맞이하여 그분에게 불빛을 비추어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등이 잘 준비가 되어 있도록 점검하고 있습니까?

 

이 일이야말로 여러분의 바람이요 환희요 기쁨이 되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 만찬 자리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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