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설교,믿음 영적인 목적지에 이르는데 피상적인 기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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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7,811회 작성일19-11-16 16:35본문
영적인 목적지에 이르는데 피상적인 기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영성 깊은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부분에 관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 하고 있는 생각들을 위한 기도 또는 간청을 위한 기도, 마음의 평정을 위한 묵상 기도, 지성으로 찾아가고자 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막혔을 때에 논리상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나,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객관적인 토론 대상이 되고 있는 좋은 주제를 구하기 위한 기도 등, 이런 종류의 기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러한 기도들에 의해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의 깊은 의미의 교제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많은 견해들이 표출 되어왔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런 종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영적인 깊은 곳을 향하여 길을 막 떠나려고 하는 영적인 시작 단계의 기도에서나 도움이 될 뿐 우리의 내면에 있는 깊은 것을 깨달을 수도 없고,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깊은 곳에 있는 중심에 도달할 수도 없다는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표면적이고 객관적인 기도는 특별히 누가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드라도 아주 단시일 내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책에서 말하려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전형적인 피상적인 기도(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도의 형태)를 지속한다면, 그러면서도 여러 해가 지나도록 영적인 진보에 있어서 더 나아지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로 지속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은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안에 그분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서, 왜 억지로 여러분이 머리를 사용하여 기도를 하고, 또 그런 종류의 기도를 하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토론의 주제를 선택하는 방법 따위를 찾기 위해서 굳이 하나님을 찾아 기도 하고자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까?
성 어그스틴은 이점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말로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마치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며 다녔습니다. 제 안에서 저를 짓누르고 있는 열정적인 논리로 주님을 바깥 어디에선가 찾으려고 애를 쓰다 지쳐버렸습니다. 제가 제안에 계신 주님을 단순히 바라고 갈망하기만 했더라면...,
저는 이 세상 도시의 거리와 광장 사방을 헤매며 다녀보았지만, 당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계신 주님을 밖에서 헛되이 찾아 헤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밖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 표면적인 정보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찾아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 믿는 자 각 사람 안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곳에 현존하고 좌정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하실 수 있는 처소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분의 진실한 거처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한 채, 늘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갈망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려는 성도들은 마치 눈 먼 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그들의 영혼이야말로 지속적으로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가 자기의 문 안쪽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습니까? 굶주린 사람이 음식 먹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그 배고픔이 채워지겠습니까?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선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항상 찾기만 하고 결코 소유하고 있는 신령한 자원들이 제공하는 축복을 누리며 만족하거나 즐기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이 밖에서 찾고 행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고 불완전한 것뿐인 것입니다.
영적인 길이 무작정 어려운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그 길이 오직 높은 지성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택하시면서 영적인 길이 결코 어려운 것도, 지성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고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점을 지적하시면서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이나 지적으로 고상하게보이는 피상적인 기도에 의지해서는 내면의 깊은 것을 깨달을 수도 없고,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깊은 곳에 도달할 수도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어미 새는 아기 새를 두고 떠날지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천부께서 그 남아 있는 새들을 돌보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우리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홀로 내버려 두시리라 생각하십니까? 공중의 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말도 할 수 없고 이성적인 능력도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필요한 먹이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데 숙달되어 있거나 숙련되어 있지도 않고, 또한 기도문 소리가 멋지게 들리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까?
사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이제까지 여러분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던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들이 없어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손실이 아니라 매우 복되고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만 걸을 수 있는 온전한 영적인 길을 갈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길이 비록 황량하고 어둡게 보일지라도 결국은 여러분을 여러분 순례자들이 마땅히 도달하여야 할 여러분의 완전한 안식처인 여러분의 목적지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영적 순례의 길에서 마땅히 도달하여야 할 어떤 특정한 목적지에 도착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매우 고통스럽기는 하는 것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끝이 없어 보이는 순례자의 길에서도 결국 여러분에게 분명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도착지는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 영적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도록 마음을 다해 격려하기를 원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지고,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아무런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마땅히 통과하여야할 이 영적인 순례의 길을 포기하거나 이 영적인 순례의 길에서 넘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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