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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사마리아 여인(The Samaritan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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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807회 작성일19-11-16 17:06

본문

사마리아 여인

(The Samaritan Woman)

(4:1-26)

 

요한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번역: 여 성 모(한국 엠마오 성경학교)

 

우리가 묵상하고자하는 요한복음에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결과에 관하여 말해주는 세 장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장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입니다. 이 요한복음 3장은 성령께서 그의 소생케 하는 역사하심 가운데 성령의 능력과 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죽은 영혼들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어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두번째 장은 요한복음 7장이며, 이 장은 성령의 내주하심이 갖는 그 내적 결과를 보여줍니다. 즉 여기서는 우리 주님께서 성령을 생수의 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7:38). 이 말씀에 이어서 그 다음 절에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7:39)고 하십니다. 그 세 번째 장은 지금 우리가 묵상하기를 원하는 요한복음 4장이며, 이 장에서 성령은 명백히 생수그리고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다루고자 하는 우리의 본 주제로 돌아가 성령을 주의깊게 묵상해 보고 또 이 성령이 어떻게 일컬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 유익하리라 봅니다. 즉 무엇이 성령의 역사이며, 그 결과로써 믿는 자로서 우리 자신들 속에서 성령 즉 솟아나는 샘물을 찾아볼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자는 말입니다. 즉 우리 속에서 성령을 발견하게 된다면 자연 우리는 믿지않는 자들이 성령님을 어떻게 거부하는지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시며, 또 우리에게 이 모든 선한 것들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희생제물과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그분의 희생과 중재 없이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께서 죄 있는 자에게 축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길 즉 이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그 어떠한 축복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영원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서만이 가장 친밀한 교제가 회복됩니다. 우리는 죄와 연합함으로 교제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게 열매를 허락함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교제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런 상태의 교제가 어떻게 보존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런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신 사역과 부활하심에 의하여 주의 백성들을 취하여 그 이전의 지위에서 완전히 구별된 상태로 옮겨 놓으시고 아버지와 교제케 하시며, 주님의 사역에 관한 한 하나님과 방해받지 않는 친교를 하게 하십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대화와 교제, 그리고 교통하는데 중보자 역할을 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주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예수님의 사람으로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자유로우며 제한받지 않는 사귐을 갖게 됩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믿음으로 하나님 존전으로 다시 불려온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이 버림받았던 자들이란 사실을 실제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이들이 거룩한 길에서 떨어져 나와 방황함으로써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받은바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일은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과 가장 완전한 결합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갖게 되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백성들은 실제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죄의 이동(떠남)과 의의 이동(들어옴)이 동시에 자신들을 이와 같은 상태로 오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주님 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몸 즉 교회가 한 몸으로 모임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완전무결한 아들임을 보게 되며 우리도(여기서 우리라 할 때 믿는 자를 두고 말하는 것 입니다) 주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된 의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하늘로 부터 보내주셔서 자기 백성의 영혼을 그의 즐거움에 참여케 한 이 성령님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래 저희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주님께서는 본래 저희 자신들로부터 저희를 끌어내어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이끌어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일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약속하신 그 약속인 것입니다: “보혜사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세상을 깨닫게 하시리라”(16:8).

 

우리가 펼치고 있는 요한복음 4장이 이 말과 완전히 일치하여 그 자체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 즉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놀라운 것들과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으로 충만한 장으로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4:1) 바리새인들이 듣고 질투하여 웅성거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과 함께 평화를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유다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셔야 했습니다; 이 일은 그 영원 전부터 계획된 권고하심 속에 이를 위해 꼭 있어야 했던 일이었으며, 따라서 한 불쌍한 죄인을 만나는 일까지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긴 여행길을 가고 계셨습니다. 매우 지쳐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다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 힘든 사역을 하시는 동안 이 세상에서의 사역은 실로 주님에게 너무나 많은 피로를 가져다주는 일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의 안식을 떠나 오셨습니다. 즉 주님은 그의 영광의 집 그리고 그 복된 집을 떠나 죄악 된 이 세상에 오셔서 참으로 지쳐 계셨습니다. 주위에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온통 예수님을 낯설고 피곤케 하여 지치도록 하는 것들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 증오, 배은, 악의, 그리고 적대행위와 수고와 같은 것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만 해도 지쳐버리는 분이지만 사랑을 증거 하는 데에는 결코 피곤해 하는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 제자들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먹을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몹시 지치게 하고 성가시게 하여 내몰리듯 빠져 나왔을 때에도 사랑으로 인하여 주님께서 기도하러 따로 빈들에나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에는 육체를 편안하게 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랑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자기 행위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어떤 이기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사랑의 모습 그 자체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해 땅에 계신 단 하나의 목적에 사로잡혀 계셨으며 아무 것도 예수님의 나아가시는 길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관련된 상황으로부터 볼 수 있는 주제 즉 한 영혼을 구원하시겠다는 그 주제로 인하여 예수님의 온 영혼이 얼마나 충만하게 가득 차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주님은 사마리아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다만 예수님은 홀로 한 수치스러운 죄인과 함께 우물가에 앉아서 영원에 관한 이 위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자신을 바라보게 하셨으며 또 여인 자신을 알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바로 이와 똑같은 사역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게로 우리 모든 영혼들을 불러 모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만 예수님 홀로 저희와 함께 앉아서 저희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 깊숙한 데로 인도 하시며, 그리고 나서 주 예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주님께서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선물들을 요청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불쌍하고 죄 많은 여인의 경우에서 주님께서 이 여인을 인도하신 그 복된 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세상에 속한 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우물가로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이 여인에게 물 한 모금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단지 찬물 한 모금 만을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으며 가장 값어치가 없는 선물인 찬물 한 모금을 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자신을 얼마나 낮추시는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사마리아인들과 어떤 사귐이나 대화를 하는 것조차도 타락한 밑바닥 인생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호의를 받기 위해 사마리아인에게 신세를 지는 일 조차도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여기 우리 앞에 사마리아인의 마을 안에서도 그 행실이 가장 타락한 사람 중에 한사람인 한 여인으로부터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부탁하시는 영광의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님에게는, 이 여인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유대인들이 여지껏 가장 심한 경멸감을 갖고 보고 취급해 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하여 이러한 부탁이 한 유대인으로부터 과연 행하여 질 수 있는 일인가하고 의아해 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제 이 되어진 일을 한번 묵상해 봅시다. 이 불쌍하고 버림받은 여인 즉 이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주님께서 만난 그 마음과 생각을 잘 묵상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유대인들이 그 이웃을 이렇게 취급하는데 있어서의 정당성 여부와 같은 논쟁에 빠져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오직 하나의 주제에만 가 있었습니다 - 그녀를 구원 하는것-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녀를 구원하는 일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자 바로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존재합니다. 즉 이 진리를 무시한다면 이 세상은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위대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물 한 모금 달라고 하는 우리 주 예수님 바로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이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저들을 권면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시면서 물 한 모금 달라고 부탁하시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주님께서는 아직도 저희에게 그 크신 온유와 사랑으로 자신을 주님께 드리라고 권면하십니다. 즉 물 한 모금의 호의를 부탁하는 주님의 이러한 인격으로 아직도 권면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분명한 점은 바로 자신을 낮추시어 죄인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아무런 부담 없이 나아오기를 부탁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점을, 즉 이렇게 행하시는 분이 영광의 주님이란 점을, 다시 말하면 이렇게 행하시는 분이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바로 이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부탁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것이 없이는 죄인이 하나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이것, 바로 이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저희가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4:10).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금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선물이란 말인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수입니다. 샘물, 즉 솟아나는 샘, 다시 말하면 영생토록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꼭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인데 - 그것은 성령을 주심이며, 둘째로는 그렇다면 그것을 주시는 분이 누구냐하는 것인데 -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저희가 후자인 그리스도를 알았더라면 (역자 주:당연히 저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너희가 기도 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1:22)는 말씀과 같이) 저희가 전자 즉 성령을 구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선물들을 구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와 관계있는 그분에 대하여 아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이 성령이라는 선물(이 성령을 주시는 자는 물론 예수님 입니다)은 믿는 자 안에서는 하나의 샘 - 즉 항상 살아있는 생수 - 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항상 가득 고여 있으나 쉽게 말라 없어지는 웅덩이의 고인 물이 아니라 말라붙지 않는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즉 믿는 자에게 들어 오셔서 영원히 살아 머물며 결코 고갈되지 않는 샘이 믿는 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것은 믿는 자에게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는 약속의 말씀 말입니다.

 

이제 이 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첫째, 이 물을 주시는 자를 아는 지식 안에 존재합니다.

이 지식이 없다면 거기에는 완전한 무지, 미개, 어리석음과 완전한 몰이해, 그리고 이 선물의 가치나 값을 인식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는 무력함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이 우물가의 여인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마음으로는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세속적인 생각이 진리를 완전히 왜곡하여 이 진리를 다른 통로로 방향을 돌려놓게 하고자 했습니다. “주여여자가 가로되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4:11). 그리고 여기서 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보게 되는데, 즉 세상, 직무, 세상에 속한 일들과 그것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은 보다 더 고상한 어떤 생각도 떠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말하는 분이 누구인지도 또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그분께서 이 여인에게 제공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참으로 눈이 멀었으며, 이 세상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로부터 시작하여 시대의 유행을 쫓는 일이나 감각적인 일을 추구하도록 잘못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 유행이나 감각적인 일을 사용하여 영혼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는데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들 그리고 진리가 단지 물동이로 둔갑하여 추락한들 그게 사탄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직 사탄이 상관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떠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가 사용하는 도구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영적인 것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우리 마음이 떠나도록 하기만 하면 사탄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입니다. 이 수단이란 쾌락일수도, 오락이나, 이득이나 명성이나 가족 일이나 합법적인 직장에서의 일 일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어떤 것이 되었든 사탄이 선택한 수단이 저희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택하는 일 만큼은 하지 못하도록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사탄이 바라는 전부입니다. 물동이는 저희를 눈멀게 하는데는 구중궁궐이 우리 눈을 멀게하는 만큼이나 잘 사탄의 목적하는 바를 위해 충실히 봉사를 합니다. 이는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한 말씀과 같습니다.

 

친구여,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역자주: 요한 넬슨 다비형제는 그의 말 가운데 친구라는 말을 사용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생각하고 사용 하였습니다-“친구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나의 친구라면 이 사람에게는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하고, 두 번째 의미도 역시 나의 친구라면 이 사람은 나에게 동일한 마음으로 친절하고 우호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 Letters of J.N. Darby Vol. III P.13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예 - 12:4, 11:11, 15:14, 15). 이와 같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위대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는 일, 즉 여러분 자신을 그분에게 내어 드리고 그분으로부터 이 생수를 얻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일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유해하지 않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 그 자체의 모양으로는 순수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이 말은 즉 그것 자체로는 오히려 칭찬 받을 만한 일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수하게 보이는 그것이 여러분과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갈라 놓을만한 충분한 무게를 갖고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낯선 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위대한 선물에 대하여 낯선 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오늘도 그 일이 무슨 일이 되었든 간에 - 가족의 일이든지 또는 합법적인 직장에서의 일이든지 -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유해하지 않는 일이라도 우리의 영적인 일을 방해하기에 충분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진저, 아마도 물동이 보다 더 해롭고 덜 순수한 것이라 할 것 같으면, 지금껏 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영적으로 분별하는데 있어 여러분의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무게를 여러분에게 더해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가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음으로 이 여인의 경우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여인의 마음은 우물가로 나온 그 목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 합법적이고 필요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계신 일들에 대하여는 아무런 마음도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때 그녀가 당장에 해야했던 일에 관계된 것 말고는 그리스도께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이 여인을 향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이신 사랑과 자비로움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생명의 주이자, 영광의 주님께서 여행 중에 있음으로 인하여 우물가에서 몹시 지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이 여인에 대한 화목을 이루는 일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와 같이 화목케 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영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그녀의 물동이에 관하여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의 판단으로는 그녀의 당장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 물동이가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이 생수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아직도 세속적인 일련의 생각을 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본문 말씀 가운데 다음의 대화에 생생히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정도까지 되어진 일을 볼 때, 우리 독자 여러분이나 본인이라면 진리 그 자체이신 우리 주님의 양 입술로부터 하신 이와 같이 권능에 찬 진리의 말씀이 이 여인을 그녀의 우매한 꿈 가운데서 깨어나도록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육에 속한 본성이 분별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 주님의 진리 말씀가운데 있다는 사실도 충분할 정도로 이 여인에게 넉넉히 보여 주셨으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아직도 아니올시다 입니다. 즉 이 여인은 진리 가운데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으며, 이어서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4:15)라고 한 대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마음은 세상에 속한 일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러한 세상에 속한 매개체를 통하여서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마음은 느낌이라든가 생각과 같은 그 자신이 스스로 쳐놓은, 조그마한 울타리 속에 갇혀 버려서 그 울타리 밖에 있는 그 이상의 그 어떤 것도 보거나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그곳 즉 그 작은 울타리 안에서 모든 즐거움을 구하며 그곳에서 살며 그곳에서 세상에 속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결국 그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는 말씀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며, 영적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는 성령 즉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저희가 이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인해 성령, 즉 하나님의 선물을 나누어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하나님과 천국에 관하여 현재 처해있는 상태 즉 하나님과 천국으로부터 내어 쫓겨져 있는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저희는 새생명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하여 마땅히 통과하여야 하는 그 출입구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성령이 그 마음가운데 들어오는 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였으므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며, 세상에 속한 자이며, 결국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게 됩니다. 이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의 그 모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신 것과는 그 방법을 달리하여 보여 주시기는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아직도 주님의 사랑의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마침내 주님께서 이 여인을 다루시는 방법을 바꾸십니다. 사랑의 주이신 우리 주님의 인내하심은 주의 백성들의 고집스러우며 말 듣지 않음으로 인하여 결코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느끼는 느낌으로 판단해 보면 구주 예수님께서 이런 한심한 정도의 우매한 상태에 있는 이 여인을 벌써 떠나 가버렸을 것이며, 이 여인을 이미 포기를 해버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눈멀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갖는 인내함이란 결코 다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내심은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 전능자이신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16)하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혜안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방법을 취하시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목적은 역시 지금까지와 행하셨던 것과 똑 같은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분은 권면도 해 보았고, 또 간청도 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4:16). 내가 네게 주겠노라고 한 모든 것을 네가 받지 않았다라는 사실에 대해 네 자신이 그 증인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나는 너로 하여금 네 자신과 네 자신의 멸망된 상태와 완전히 비참하게 되어있는 네 모습에 대하여 스스로 네 자신을 바라보는 분명한 관점을 갖도록 해야 되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단 한절의 힘있는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의 부정한 작은 세계가 그 마음에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무엇을 하고 사는 여인인지를 분명히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당신께서 어떠한 분인지를 아는 지식에 이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 이 여인이 그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이분으로 인하여 그녀의 마음속과 삶의 비밀들이 여지없이 들추어졌던 것입니다. 주님이 죄인의 양심에 있는 현을 두들겨 그 양심을 일깨워 놓으신 것입니다. 드디어 그 양심의 현이 진동을 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그전에는 실제로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 우물가에서 만난 낯선 나그네로부터 확인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아주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것들을 들추어 내셨고, 그녀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도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심으로 결국 그녀로 하여금 주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감추어진 깊은 것이라도 다 통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죄에 관하여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 경우, 대개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은 연후에나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능력을 받아 집으로 와서 죄인들의 영혼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 25)함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 속에 감추어진 모든 밀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 주님, 그리고 우리 마음의 비밀을 다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양손에 한번 들어가면 밀어 제치거나 씨름을 한다고 해도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도록 하시는 주님, 이러한 우리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가 분명한 이해에 도달하기 전까지 주님께서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심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판단을 받습니다. 책망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린 채로 벙어리가 되어 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분의 권능을 느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4:29). 결국 이렇게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비록 허락된 축복에 대하여 분명히 아는 것이 없는 중이라 하더라도 영혼들이 자기들과 관계가 있는 주님의 권능을 보고 느끼도록 영혼들은 불려 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을 감찰하시며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찾아 드러내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가오실 때에는 우리가 주님을 상대로 하여 우리의 죄를 감추는 일은 헛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보고 느끼도록 하심으로 우리 영혼들을 불러 모으신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이제 물동이에서 완전히 떠나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예배, 즉 신령한 예배에 관하여도 이곳에서 그녀에게 대답하신 말씀을 통하여 많은 신령한 묵상들이 이야기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완전한 가르침이 여기에 모두 다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시 이 문제는 접어두고, 우리 주님과 이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복된 목적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여인은 드디어 주님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 된다고 하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아는 참된 지식에 거의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구속의 주가 그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게 될 그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이 여인을 친히 인도하심으로 이 여인 스스로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4:25, 26).

 

형제여, 이제 지금까지의 묵상해 온 내용 가운데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 주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는 각 단계를 다시 밟아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그 길을 통해 얼마나 완전무결한 축복과 자비를 받게 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수치스러움 중에 있는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에 대하여 우둔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주님의 자비로운 손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한마디의 화를 내시는 일도 없습니다. 또 단 한마디의 책망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주님의 입술로부터 조용히 흘러나오는 말로 속삭이듯 말씀을 하실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주님은 이 여인의 죄를 그녀에게서 기억나도록 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4:17).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우리 주님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최고로 이 여인의 마음을 끌게하여, 그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택하여 주님 자신을 이 여인에게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시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벽으로부터 당장 탈출하여 즉각 예수님을 찾고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드러내시고자 하는데도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사람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래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바쁜 형편에 있기 때문에, 즉 우리가 직접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꼭 해야 할 일, 약속된 일, 그리고 이 세상의 쾌락된 일 등등, 이런 일들에 너무 많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우리 손에 붙잡고 있는 물동이에 너무 많이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우물가에 앉아 계시는 영광의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모셔 보십시오. 그러면 심지어 현재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자인 이 세상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방법으로 이 여인이 자비로운 우리 주님 앞으로 불려 나오게 되었는지요! 어떠한 형태의 질책도, 거슬리게 하는 일도, 불친절한 말 한마디도 없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저 이 여인의 심령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심령으로 하여금 우리 주님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큰소리로 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4:26). 여기서 비로소 이 여인은 자기 영혼이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이 오시리라 하는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소망은 이 여인도 갖고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찬물 한 모금을 간청하시는 분으로 나타낼 정도로 겸손과 사랑이 충만한 그런 자비로운 주님을 직접 뵈올 줄을 이 여인이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영혼이든지 그 영혼이 주님에게 무엇이든 구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드러내 보여 주시는 전형적인 우리 주님의 방법이자 태도인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는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에게 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 가운데서 완전한 온유, 완전한 사랑, 완전한 겸손 가운데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심령을 다 꿰뚫어 알고 계심으로 우리 주님의 권능의 위대하심의 어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후에 분명한 음성으로 내가 그로라”(4:26)고 하시며, 마침내 주님 자신을 친히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그 복된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때 죄인은 친절을 베푸시기 위해 그 친절에 대하여 기꺼이 빚진 자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되고, 바로 이 복된 순간에 이런 자비하신 우리 주님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담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이 구하는 그 순간 이 죄인은 주님께서 크고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대하여 아무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아니하노라. 지금 당장 너희에게 무슨 책망을 하려고 하지도 아니하노라. 그리고 오히려 이 중요한 것을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을 청하노니 너희가 이런 나의 간곡한 부탁에 응하여 이것을 구하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너희가 내게 구할 최상의 선물, 즉 하나님의 선물을 너희에게 주겠노라.’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즉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4:10). 그리스도께서 생수, 즉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너희 구하는 자에게 주었으리라.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하게 행하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우리 영혼이 우리에게 허락된 이 복된 초대에 응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의 말씀을 주십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우리 영혼들로 하여금 길을 잃어버린 채 타락되어 있는 그 자신의 실제 처해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 영혼들은 죄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먼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4:19)라고 고백을 한 직후에 마을로 돌아와서는 “(그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였노라”(4:29)라고 말한 이 여인의 말은 바로 주님께서 한 영혼에 대하여 역사하심으로 그 영혼에게 확신을 심어 주었을 바로 그때, 한 심령의 깊은 데로부터 느낀 체험가운데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 전에 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며, 또 우리에게 지금 말씀을 하고 계시는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을 터인데 이와 같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우쳐 알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단 우리 주님을 알게되고 나면 우리는 주님에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미 주시기로 작정하였던 그 복된 선물을 마침내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낯 선자요, 외국인이요, 원수 되었던 자로서 이전의 우리의 지위에서 끌려 나오게 되고, 이제 새로운 지위로의 연합, 즉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천국에 속한 한 부분 -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한 몸 - 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 일에 관하여 증거 하기 위하여 주어지게 됩니다. 즉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한 지위에다 올려놓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 다음에 이어서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본문 말씀에서 그 다음에 나온 성령 역사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4:28) 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라고 간청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고 난 후에라야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육신에 속한 마음이 그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던 일에서 완전히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이 여인이 당시에 그녀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원하였던 전부였습니다. 이 여인의 온 마음은 바로 그 한 가지 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여인은 우물과 물과 물동이에 관해서 더 이상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또하나의 새로운 관심의 대상에 온 마음을 집중하였으며, 이제는 이 새로운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친히 이 여인의 영혼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즉 메시야의 영광이 바로 그녀 자신의 삶의 목표이자 인생전체의 목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제 주님을 압니다. 소문으로 아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개인적인 관계로 이 여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여인은 즉각적으로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한 영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생일대의 사건으로서 완전무결한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모든 것들이 이제는 각자에게 합당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제자리에 놓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무질서요 혼돈이던 곳에 이제 질서가 들어선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분 자신이 생명이자 또한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보러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모든 최종결정권을 우리에게 기꺼이 맡겨놓으시며 이렇게 우리에게 직접 간구하고 계시는 주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주님을 뵈러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친히 간청하시고 그 결정권을 우리에게 일임하실 때, 이런 일이 실제로 우리의 두 눈으로 목격되어진 곳, 그곳에서의 혁명은 완전무결한 혁명입니다: 즉 이런 완전무결한 혁명을 경험한 영혼은 - 내가 진실로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가? 이해와 특권과 영광에 있어서 우리 주님과 내가 확실히 연합되어있는가? 또한 주님은 진정 나의 생명이 되시는가? 그렇다면 내게 있어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의 영광을 위하는 일 말고, 또한 주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비하심에 대하여 내가 감사를 드리는 일 말고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 하는 보석 같은 주제들에 대한 질문을 갖도록 인도받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 여인의 부끄러운 자기수치로부터 자기 확신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하여 한 영혼을 이와 같은 상태로 불러 만드는 것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모든 생각들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이와 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영혼이 소생케 되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샘물이 우리 가운데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영혼 속에 항상 솟아나는 어떤 놀라운 것이 있게 되며 여기에는 항상 우리에게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는데, 이 놀라운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영생수 샘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이제 이 영혼은 우리 주 예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되고 이때부터 주 예수님의 모든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완전무결한 인식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이해에 도달하게 되면 이 영혼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더 이상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즉 부와 권력과 명예도 능히 경멸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영혼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부를 찾지 않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부를 누리며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능력을 갖고 있으며, 더 이상 이 세상 명예에 연연해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온전한 명예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인지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 한, 우리 기쁨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신성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인데, 이 신성은 그 영광스러운 수여자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원한 샘물이 되시며, 이 샘물은 영광의 주님으로부터 길러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영혼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안에서도 이렇게 늘 솟아오르는 샘물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께서 그 샘물의 근원 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물과 여러분에게 구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여러분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여러분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주심에 관하여는 아무런 의심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구하였다면 우리 주님이신 그가 여러분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아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분에게 구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 속에 이 샘물을 갖고 계십니까? 이 샘물은 여러분의 심령 안에서 솟아오르고 있습니까? 남의 샘물에서 물을 긷는 것과 이 샘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샘물에서 물을 긷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목마른 영혼이 그 자신 안에서 스스로 시원함을 체험하지 못하였다면 자신이 아닌 다른 믿는 자 안에서 찾아 낸 샘물에서 어떠한 유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샘물에서 이 시원함을 스스로 체험하였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실제적인 영향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과 분리되어 졌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도 구별되어진 자 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고상한 소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즉 이렇게 고상한 소명은 하나님의 후사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공동 후사가 되는 바로 이 일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주님이라 할 때, 주님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거룩하시며 해를 끼치는 것을 모르시며 흠이 없으시며 모든 죄에서 분리되신 분이란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성령은 여러분의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분이라는 증인이 되시며 주님께서 이를 여러분에게 친히 증거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너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영광이 이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백성의 영혼들 위에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통해 주의 백성들은 내적으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어 지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첫째 아담과 함께하는 지위에 참여한 자의 신분에서 빠져나와 결과적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주의 백성들은 모두가 마지막 아담의 일부이자 한 몸으로 연합됨으로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증거를 주의 백성들은 외적으로도 드러내도록 요청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한 주제를 아셨습니까? 즉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보셨다면 그리고 나서 주님에게, 여러분이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꼭 안겨 주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셨다면 주님께서 하신 대답은 이것을 너희에게 보여준다면 이것이야말로 너희들의 바람이자 목표이자 기쁨이 되리라고 하는 이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여러분들 속에도 바로 이 생수 즉 이 샘물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 샘물이 여러분 안에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장차는 모르는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친구여, 속임을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즉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이 샘물을 갖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백성에게 주시는 내적으로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샘물을 갖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이 어떠한 다른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니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시험과 시련 그리고 갈등의 햇살이 여러분에게 내려 쪼일 때에는 여러분 안에 있다고 하는 그 알 수 없는 그것은 결국, 솟아나는 샘물도 없고 어떤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원천도 없는, 아무 쓸모도 없는 웅덩이로 바짝 말라붙어 있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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