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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나눔터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진실하고 지극한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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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778회 작성일19-11-1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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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준형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아마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여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신약 성경에 자주(14) 언급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주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면에서 너무나 진실하고 지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자리 잡은 막달라라고 하는 동네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도 마리아의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최소한 여섯 분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분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을 낳은 마리아(1:16)

 

2.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19:25)

 

3.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27:56)

 

4.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11:1,5)

 

5.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12:12)

 

6. 로마 교회의 자매 마리아(16:6)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의 삶에 나타난 행동 하나 하나를 살펴 볼 때 깨닫게 되는 것은, 그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진실하고, 참으로 지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주님을 인 같이 자기의 마음에 품었고 도장 같이 그의 팔에 새겼으며, 그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했습니다. 그의 사랑의 불길은 많은 물이 끄지 못했고, 홍수라도 엄몰할 수 없었습니다(8:6,7). 마리아의 이 사랑엔 사단의 어떠한 위협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각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을 따라 다니며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으며 주님께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해 가실 때 그 뒤를 좇아 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어도 그는 그 십자가 곁에 와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을 모셔다가 무덤에 모실 때에 그는 그 무덤을 알아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주님을 찾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가 그처럼 진실하게 사랑한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섬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1. 주님을 알기 전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전에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16:9; 8:2). 그러나 그가 일곱 귀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 여자였던가를 환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존엄한 인생이 잔악한 귀신들에게 마구 짓밟힌 모습이니 그 가련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 은혜로우신 주 예수님

 

그러나 아무 쓸모없는 진흙을 이겨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예수님께서, 진흙같이 악귀들에게 마구 짓밟히던 그 쓸모없게 된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으니 우리는 여기서 강도를 만나 옷을 다 벗기우고 얻어맞은 거반 죽게 된 상태로 길 가에 버림을 당한 사람을 찾아 어루만져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주막으로 옮겨 주시고, 지금까지 든 비용뿐만 아니라 앞으로 들 비용까지 다 부담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떠나가시던 "선한 사마리아인",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매우 감동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은혜로우신 주 예수님의 권능에 못 이겨 악한 귀신은 마리아에게서 쫓겨 나갔습니다.

 

귀신만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있으라고 명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까지 그 마음에 비추어 주셨으니 마리아는 자기가 생각지 못했던 더 귀한 것까지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만약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그는 몸이 회복된 후에도 삶의 목적이 없어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후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의 생애가 아름답게 전개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리아에게 사실이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이 된 마리아

 

하나님께서는 이때로부터 마리아의 중요하고 아름다운 행적을 하나 하나 성경에 기록하며 우리 앞에 기념하고 계시니 우리가 이를 주목하여 교훈을 받음이 합당한 일로 여겨집니다. 이제 마리아에 관한 그 첫 번째 기록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 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13)

 

이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며 그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크게 업신여김을 받던 때이므로 주님을 믿고, 쫓아 섬긴다는 일은 완전한 자기 부정, 즉 주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첫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인용한 누가복음 81절에서 3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과 또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 "열 두 제자"와 여러 여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생각할 때 "열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도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상태이므로(6:1216) 이에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러 여자들이 여자의 신분으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주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그 일행을 섬겼다는 것은 그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비범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여자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가 그의 받은 구원(축복) 보다는 자기를 구원해 주신 구주(축복해 주신 분)를 더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의 마리아의 행한 일들을 보면 그 생각이 항상 마리아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방황할 때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 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40:31). 또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27:8)고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주님을 좇아 다니며 한 일들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상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주님의 얼굴을 보며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 경외심 또는 사모심을 더욱 깊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기고(4:23), 또 그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랐다면(4:32), 들을 귀를 가진 마리아는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마리아는 다른 동료 여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주님께 음료수를 준비해 드리며, 때가 되면 식사를 준비하여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세탁물을 깨끗이 빨아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편안히 주무시도록 잠자리도 준비해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3).

 

여기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은 삼십에 주님을 판 가룟 유다나 주님께 드리려고 했다가 그 얼마를 감추고 드린 아나니아와 삽비라나, 구약의 아간과 발람같은 이들과는 달리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기는 마리아의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주님께 물질을 바쳤다는 사실 보다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에서 배우게 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4. 주님과 신분을 같이 하는 마리아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 있었고, 마리아의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을 지고 오시느라고 피곤해지신 몸으로, 비정하고 포학무도한 사람들에 의해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계셨고, 그 밑에서는 사람들마다 침을 뱉으며, 고개를 흔들며, 모욕적인 말을 하고 희롱하며 또 주님의 옷이 탐이나서 그것을 위해 제비를 뽑고 있는 중, 그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 '곁에' 막달라 마리아가 소수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와 서 있었으니 사랑은 실로 위대하고 아름답고 담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께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겠나이다'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는 이미 그 목숨을 주님께 바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마음의 결심이나 작정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와 신분을 같이 하는, '결행'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언젠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22:28) 하시며 그들의 함께 해준 일을 기억하셨습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2:13).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8).

 

주님은 이와 같이 주님과 신분을 같이 하는 개인이나 교회를 기억하사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때 주님의 십자가 곁에 와 서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때 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고 최대의 봉사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인도한 봉사요, 또 사랑을 대치할 만한 봉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주님의 발에 붓는 마리아를 보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 하니"(12:5)라고 타산적으로 생각하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7,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2:4,5 참조).

 

이로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동시에 또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도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8:10)고 하신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 곁에 와 서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속으로 감탄하사 이르시기를 '나의 열 두 제자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사랑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5. 주님을 찾는 마리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20:1).

 

"이른 아침 어두울 때에"무덤을 찾은 마리아에게 우리는 주님을 깊이 사모하는 마리아의 은밀한 사랑에 크게 감탄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마리아가 나약한 여자로서 당연히 무서워했을 새벽녘의 어두움과 무덤을 개의하지 아니 한 것을 볼 때 마리아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랑 곧 "온전한 사랑"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마리아를 강권하여 주님을 찾도록 인도한 것이니 마리아도 사랑이 없었더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되 "멀찍이"(26:58) 따랐을 것이며, 또 베드로가 원수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그들이 피어 놓은 불을 쬐고 있었던 것처럼 마리아도 세상 사람들과 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22:55). 이와 같이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되니 사랑이 없으면 주님과 사귄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주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줄로 생각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 도움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주님을 찾아 줄 상태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0:10)

 

이 두 제자가 무슨 일이 바빠서 즉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는지 몰라도 주님을 찾으로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20:9 참조). 그러나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11절에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그 주님을 찾지 못한 채 발길을 돌이킨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주님을 찾을 길이 없어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울면서"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사랑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눈물을 흘릴지도,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 볼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헛되이 찾는 법이란 결코 없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마리아가 천사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점입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20:15).

 

"내게 이르소서" 하며 마리아는 흥분한 듯 강권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찾고 있는 예수님은 최소한 마리아의 뇌리에는 차디찬 시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하며 주님의 시체를 당장 번쩍 안고 갈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서 과분한, 또는 광신적인 행동이었겠습니까? 이성을 잃은 행동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선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 예수님을 자기 생명처럼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이런 마리아를 기뻐하셨는가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제일 처음 만나 주신 것과, 또 그 사실을 그 제자들에게 알리는 첫 특사로 삼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6. 주님을 만난 마리아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20:16).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마리아의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바벨론에서 돌리실 때의 감격도(125:13), 또는 우리 민족의 삼십육년의 일제 압박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감격도 이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찾던 주님은 죽은 시체이었는데 그가 만난 주님은 시체가 아니고, 다시 살아나신 영광의 몸을 가지신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29:13)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자는나도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리아는 즉시 "랍오니여"하여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한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눈으로 분별할 수 없었던 주님을 "음성"으로 분별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으로다"(고후 5:7)고 한 말씀이 실로 옳은 줄 깨닫고 됩니다. 마침내 주님은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살아나심을 알리는 첫 특사로 삼으셨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계시니이까"하고 물으셨을 때 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는데(왕하 2:14) 우리 중에 누가 '마리아의 주님은 어디계시니이까'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찾아 만나겠는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아마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여자일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신약 성경에 자주(14) 언급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주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면에서 너무나 진실하고 지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자리 잡은 막달라라고 하는 동네에서 태어났거나, 거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도 마리아의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최소한 여섯 분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분을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을 낳은 마리아(1:16)

 

2.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19:25)

 

3.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27:56)

 

4. 마르다의 동생이며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11:1,5)

 

5.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12:12)

 

6. 로마 교회의 자매 마리아(16:6)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의 삶에 나타난 행동 하나 하나를 살펴 볼 때 깨닫게 되는 것은, 그의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진실하고, 참으로 지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진실로 주님을 인 같이 자기의 마음에 품었고 도장 같이 그의 팔에 새겼으며, 그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했습니다. 그의 사랑의 불길은 많은 물이 끄지 못했고, 홍수라도 엄몰할 수 없었습니다(8:6,7). 마리아의 이 사랑엔 사단의 어떠한 위협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각 성과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주님을 따라 다니며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으며 주님께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해 가실 때 그 뒤를 좇아 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다른 제자들은 요한을 제외하고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어도 그는 그 십자가 곁에 와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을 모셔다가 무덤에 모실 때에 그는 그 무덤을 알아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주님을 찾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가 그처럼 진실하게 사랑한 주님을 믿고, 따르며 섬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1. 주님을 알기 전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전에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경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전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16:9; 8:2). 그러나 그가 일곱 귀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 여자였던가를 환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존엄한 인생이 잔악한 귀신들에게 마구 짓밟힌 모습이니 그 가련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 은혜로우신 주 예수님

 

그러나 아무 쓸모없는 진흙을 이겨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예수님께서, 진흙같이 악귀들에게 마구 짓밟히던 그 쓸모없게 된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으니 우리는 여기서 강도를 만나 옷을 다 벗기우고 얻어맞은 거반 죽게 된 상태로 길 가에 버림을 당한 사람을 찾아 어루만져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주막으로 옮겨 주시고, 지금까지 든 비용뿐만 아니라 앞으로 들 비용까지 다 부담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떠나가시던 "선한 사마리아인",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매우 감동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은혜로우신 주 예수님의 권능에 못 이겨 악한 귀신은 마리아에게서 쫓겨 나갔습니다.

 

귀신만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있으라고 명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까지 그 마음에 비추어 주셨으니 마리아는 자기가 생각지 못했던 더 귀한 것까지 받았습니다. 마리아가 만약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그는 몸이 회복된 후에도 삶의 목적이 없어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후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의 생애가 아름답게 전개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리아에게 사실이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이 된 마리아

 

하나님께서는 이때로부터 마리아의 중요하고 아름다운 행적을 하나 하나 성경에 기록하며 우리 앞에 기념하고 계시니 우리가 이를 주목하여 교훈을 받음이 합당한 일로 여겨집니다. 이제 마리아에 관한 그 첫 번째 기록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 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13)

 

이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며 그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크게 업신여김을 받던 때이므로 주님을 믿고, 쫓아 섬긴다는 일은 완전한 자기 부정, 즉 주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과 사랑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리아가 그렇게 하는 첫 장면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인용한 누가복음 81절에서 3절까지는 우리 주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과 또 그 일에 동참하고 있는 "열 두 제자"와 여러 여자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생각할 때 "열 두 제자"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도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상태이므로(6:1216) 이에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러 여자들이 여자의 신분으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주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주님과 그 일행을 섬겼다는 것은 그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비범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여자들 특히 막달라 마리아가 그의 받은 구원(축복) 보다는 자기를 구원해 주신 구주(축복해 주신 분)를 더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의 마리아의 행한 일들을 보면 그 생각이 항상 마리아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방황할 때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 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40:31). 또는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27:8)고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주님을 좇아 다니며 한 일들은 무엇이겠습니까? 함께 상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주님의 얼굴을 보며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 경외심 또는 사모심을 더욱 깊어지게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기이히 여기고(4:23), 또 그 권세 있는 가르침에 놀랐다면(4:32), 들을 귀를 가진 마리아는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마리아는 다른 동료 여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주님께 음료수를 준비해 드리며, 때가 되면 식사를 준비하여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세탁물을 깨끗이 빨아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편안히 주무시도록 잠자리도 준비해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8:3).

 

여기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은 삼십에 주님을 판 가룟 유다나 주님께 드리려고 했다가 그 얼마를 감추고 드린 아나니아와 삽비라나, 구약의 아간과 발람같은 이들과는 달리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기는 마리아의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주님께 물질을 바쳤다는 사실 보다는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에서 배우게 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15).

 

4. 주님과 신분을 같이 하는 마리아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이미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 있었고, 마리아의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을 지고 오시느라고 피곤해지신 몸으로, 비정하고 포학무도한 사람들에 의해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계셨고, 그 밑에서는 사람들마다 침을 뱉으며, 고개를 흔들며, 모욕적인 말을 하고 희롱하며 또 주님의 옷이 탐이나서 그것을 위해 제비를 뽑고 있는 중, 그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 '곁에' 막달라 마리아가 소수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와 서 있었으니 사랑은 실로 위대하고 아름답고 담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께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겠나이다'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는 이미 그 목숨을 주님께 바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마음의 결심이나 작정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와 신분을 같이 하는, '결행'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언젠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22:28) 하시며 그들의 함께 해준 일을 기억하셨습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2:13).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8).

 

주님은 이와 같이 주님과 신분을 같이 하는 개인이나 교회를 기억하사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때 주님의 십자가 곁에 와 서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때 그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고 최대의 봉사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인도한 봉사요, 또 사랑을 대치할 만한 봉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주님의 발에 붓는 마리아를 보고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 하니"(12:5)라고 타산적으로 생각하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2:7,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2:4,5 참조).

 

이로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동시에 또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도 배우게 됩니다. 주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8:10)고 하신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 곁에 와 서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속으로 감탄하사 이르시기를 '나의 열 두 제자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사랑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5. 주님을 찾는 마리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20:1).

 

"이른 아침 어두울 때에"무덤을 찾은 마리아에게 우리는 주님을 깊이 사모하는 마리아의 은밀한 사랑에 크게 감탄하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마리아가 나약한 여자로서 당연히 무서워했을 새벽녘의 어두움과 무덤을 개의하지 아니 한 것을 볼 때 마리아의 마음속에 어떠한 사랑 곧 "온전한 사랑"이 역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마리아를 강권하여 주님을 찾도록 인도한 것이니 마리아도 사랑이 없었더면 베드로처럼 주님을 따르되 "멀찍이"(26:58) 따랐을 것이며, 또 베드로가 원수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그들이 피어 놓은 불을 쬐고 있었던 것처럼 마리아도 세상 사람들과 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22:55). 이와 같이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되니 사랑이 없으면 주님과 사귄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주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줄로 생각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 도움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주님을 찾아 줄 상태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0:10)

 

이 두 제자가 무슨 일이 바빠서 즉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었는지 몰라도 주님을 찾으로 간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20:9 참조). 그러나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11절에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그 주님을 찾지 못한 채 발길을 돌이킨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주님을 찾을 길이 없어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울면서"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사랑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마리아가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눈물을 흘릴지도,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 볼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헛되이 찾는 법이란 결코 없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마리아가 천사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점입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20:15).

 

"내게 이르소서" 하며 마리아는 흥분한 듯 강권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찾고 있는 예수님은 최소한 마리아의 뇌리에는 차디찬 시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하며 주님의 시체를 당장 번쩍 안고 갈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서 과분한, 또는 광신적인 행동이었겠습니까? 이성을 잃은 행동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 있어선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 예수님을 자기 생명처럼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이런 마리아를 기뻐하셨는가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제일 처음 만나 주신 것과, 또 그 사실을 그 제자들에게 알리는 첫 특사로 삼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6. 주님을 만난 마리아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20:16).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을 때 마리아의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바벨론에서 돌리실 때의 감격도(125:13), 또는 우리 민족의 삼십육년의 일제 압박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감격도 이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찾던 주님은 죽은 시체이었는데 그가 만난 주님은 시체가 아니고, 다시 살아나신 영광의 몸을 가지신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29:13)고 하신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자는나도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하신 말씀의 성취입니다.

 

마리아는 즉시 "랍오니여"하여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한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눈으로 분별할 수 없었던 주님을 "음성"으로 분별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으로다"(고후 5:7)고 한 말씀이 실로 옳은 줄 깨닫고 됩니다. 마침내 주님은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내어 자신의 살아나심을 알리는 첫 특사로 삼으셨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계시니이까"하고 물으셨을 때 물이 이리 저리 갈라졌는데(왕하 2:14) 우리 중에 누가 '마리아의 주님은 어디계시니이까'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찾아 만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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